사진가/사진철학 잡담

잡담_ 내 사진은 취미, 재미로 찍는 것

나그네_즈브즈 2020. 10. 25. 17:02

괴롭다. 요즘 장비병과 작가병을 동시에 앓고 있다. 새로운 카메라를 사고 싶어졌고, 그러기 위해 만든 명분이 하필이면 '나만의 작품세계'를 가꾸어 나가겠다는 포부였으니... 곡소리가 날 법도 하다. 물론 나만의 주제로 꾸준히 작업을 이어나가고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 공모전에 출품해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배움의 과정이다. 두 가지 모두 선택과 집중을 통해 나만의 톤을 발견하고 문제해결력을 기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공모전에 출품하려면 양심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노력은 더해져야 한다. 특정 주제와 소재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게 되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나만의 사진력으로 완성도 있는 하나의 작품을 낳기까지,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는 속에서 성장은 일어날 것이다.

 

주제작업은 더 그렇다. 공모전이 아마 1년 동안 1개의 작품을 깎아내는 도전이라면, 포트폴리오는 모르긴 몰라도, 그런 걸 30개 만드는 정도의 일인 것 같다. 물론 난 좋아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포기했지만.

 

이 험난한 도전에 참여하기 위해 새 카메라를, 그것도 풀프레임 바디와 렌즈를 사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현혹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래서 스트레스만 받고 있다. 내 성격에 공모전 출품을 준비하면, 십중팔구 입상을 못해 크게 실망할 게 뻔하다. 틀려먹었다. 이성이 요구하는 바로는 자고로 이런 건, 재미로 내보고, 재미로 노력하고, 그러다가 '어쩌다' 수상을 하기도 하는 그런 과정이라야 한다.

 

사진은 사냥이다. 사냥감을 찾아 고르고, 서로 힘을 겨루고, 최후의 일격을 shoot해서, 상대를 내 것으로 가지는 과정이다. 육식을 하는 동물들의 조상에게 이 기술은 생존에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그 후손들 중에는, 어려서부터 이런 능력을 훈련하는 개체들도 있었을 것이다. 몸을 낮추고 점프하고 밀어내고 급소를 노리는 놀이를 통해서 말이다.

 

나비 못잡아도 죽지 않는다. 놀이는 사냥을 배우는 과정. 재미를 느껴야 또 할 수 있다.

 

인간에게도 사냥은 그런 의미였다. 육식에 특화된 이 새로운 영장류는 사냥에 더 많이 의존해야 했다. 거기에 재미를 느끼고 어려서부터 놀이를 반복할 수 있는 DNA를 운 좋게 물려받은 자손들은 더 자주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진화는 멈추었다. 농경이 시작되고 계급이 출현했다. 이제는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는 인류와 재미로 사냥을 하는 인류가 공존해 살고 있다. 

 

낚시는 사냥이다. 수산물을 구해야만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고, 손맛과 승리의 짜릿함을 즐기는 강태공들도 있다. 사진도 사냥이다. 고객이 요구하는 사진을 찍거나 전시에서 작품을 팔아야만 벌이가 유지되는 사냥꾼과, 재미로 장비를 갖추고 재미로 셔터를 누르는 사냥러들이 공존하고 있다.

 

강태공 어르신. 사냥은 생존일 수도, 놀이일 수도 있다.

 

이 둘의 구분은 능력의 차이라기보다, 내 생각에는, 절실함의 차이에 따라 나타나는 것 같다. 내가 사진작가들처럼 예민하게 빛의 냄새를 맡고 피사체의 영혼과 치열하게 겨룰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오늘 당장 '그 녀석'을 찍지 못해도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다. 내가 가진 가장 날카로운 무기는, 다름아닌 '재미'다.

 

놀이와 노동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목적과 수단이 분리되어 있는가의 여부다. 먹고 사는 목적 아래 사진을 수단으로 삼을 필요없이, 사진의 카테고리가 아우르는 그 모든 것이 목적이면서 동시에 수단인, 이 좋은 '놀이'를 잃지 말아야겠다.

 

재미로 하자. 쉬엄쉬엄, 그냥 놀면서 하자. 기대하고 바라지 말자. 좋아하는 게 없으면 어떤가. 포트폴리오, 그런 거 없는 취미사진가가 한둘인가. 공모전에 출품하는 자체가 내겐 영광이다. 사진 한 장에 참가비 천 원이 큰 돈도 아니잖은가. 새 카메라? 사고 싶으면 그냥 사자. 듣보잡 셔터쟁이가 장비병 치료하는 데 명분은 개뿔. 돈만 있으면 풀프레임 아니라 중형을 산들 어떤가. 

 

나는 그저 강태공, 내 사냥은 '조기 축구'다. 잊지 말자 즈브즈. 사진은 취미. 세월이나 보내며, 그저 재미로 찍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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