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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벽두 헛짓거리 : 카메라 가격은 각 스펙 가치의 합계일까?

나그네_즈브즈 2021. 1. 3. 14:01

해피 뉴 이어! 신축년 새해가 밝았다. 한 살 더 먹었다. 슬프다. 괜히 생각이 많아진다. 앞으로도 이 블로그에 글감을 계속해서 불어넣을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변태스러움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일 카메라 브랜드 사장이라면, 어떤 카메라를 디자인할 것인가? 소비자들의 입맛에 딱 맞는 새 제품을 개발하게 된다면, 가격은 어떻게 책정하면 좋을까? 그러다 문득 이런 호기심이 일었다. 혹시 카메라의 가격은 각각의 스펙이 지니는 시장성의 총합이 아닐까? 예를 들어보자.

 

카메라의 가격이 센서크기와 다이얼 개수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풀프레임이 APS-C보다는 1.5배 크고 마이크로포서드보다는 2배 크다. 그러니 풀프레임에 6점, APS-C에 4점, 마이크로포서드에 3점을 준다. 다이얼은 개수에 따라 1점씩이다. 예를 들어, 제조사를 불문하고 센서는 점수당 25만 원이고 다이얼은 한 개당 15만 원이라면 어떨까? 풀프레임에 다이얼이 5개 박힌 플래그십 카메라는 225만 원 근처에서 시장가격이 형성될 것이다. APS-C 센서에 다이얼을 두 개 넣은 괜찮은 중급기를 개발하면 130만 언저리로 출시가를 매기면 험한 욕을 면할 수 있는 식이다. 

 

실제로는 훨씬 많은 변수들이 존재하겠으나, 그 복잡성을 떠나서 과연 이런 방정식이 성립할까? 내 안의 변태니스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직접 시도해보기로 했다.

 

동원할 수 있는 수학적 도구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나는 우선 최대한 모델을 단순화하기로 했다. 기본 전제는 앞서 상상한 대로, 카메라의 가격이 각 스펙이 지닌 가치의 단순 합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덧붙여서, 카메라의 주요 스펙으로는 지극히 내 개인의 주관을 담아 29가지를 설정했다. 가독성 저하를 무릅쓰고서라도 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4 : 센서크기, 화소수, 이면조사, 로우패스필터 제거

4 : AF포인트 개수, 하이브리드AF(또는 듀얼픽셀AF), eye-AF, 동영상 eye-AF

2 : 초당 연사량, 1/8000초 고속셔터 지원여부

5 : 4K영상 최대프레임, 무제한 4K촬영, 로그촬영, 타임랩스, 마이크단자

3 : 5축 바디 내 손떨림방지, 터치스크린, 플립/스위블 모니터

2 : 뷰파인더 해상도, 모니터 해상도

5 : 방진방적 설계, 다이얼 개수, 듀얼슬롯, UHS-II 호환, CF(or XQD)카드 호환

2 : 촬영 중 충전(또는 전원공급), 배터리 용량

2 : -무게, -유통일수(출시연월-현재연월)

 

무거울 수록, 오래된 제품일 수록 가격은 내려가니까 앞에 마이너스 부호를 붙였다. 중학생 때 배운 연립방정식으로 치자면, 변수가 29개인 셈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변수가 x와 y 두 개일 때 방정식이 두 개 있어야 답이 나오니까, 변수가 29개인 지금은 방정식이 29개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29개의 방정식을 어디서 구하냐고? 흐흐. 다나와에 널려 있다. 렌즈교환형 미러리스로 제한해서, 인기순으로 1등부터 29등까지의 카메라를 가지고 일일이 스펙을 확인해가며 엑셀로 표를 만들었다. 당연히 가격도 입력했다. 이 짓거리 하느라 포스팅이 늦어진 거다.

 

다나와 인기순 TOP30 카메라의 29가지 스펙과 가격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로그촬영/타임랩스/뷰파인더/모니터/다이얼개수/촬영중충전 이 옵션들은 다나와에서 정보를 일관되게 제공하지 않아서 일일이 제조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광고 카탈로그들은 죄다 이미지 파일이라 Ctrl+F 기능으로 원하는 단어를 쉽게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 스크롤을 내려가며 잠자리 눈으로 일일이 찾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엑셀의 원본 데이터 자체에 결함이 있을 수는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라이카 제품은 제외시켰다는 점도 미리 밝혀둔다.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AX = B

 

행렬로 표현하면 위처럼 간단히 나타난다. A는 내가 엑셀에 노가다로 입력한 숫자들의 배열이다. X 속에는 29개 변수들의 아직은 알 수 없는 가격들이 들어있다. B에는 29개 카메라들의 현재 가격(렌즈미포함 새제품)이 포함되어 있다. 방정식의 모든 계수를 준비했으니, 자 이제, 풀어보도록 할까. 정확한 답은 기대하지 않는다. 이 작업은 마치, x-y 좌표평면 위에 어떤 분포를 가진 점들을 촤르륵 흩뿌려둔 뒤에, 그 경향을 가장 잘 표현하는 직선을 찾아내는 것과도 같다. 당연히 점들의 대다수는 직선 '근처에' 자리하게 될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도 딱 그만큼이다. 오차가 가장 적어지도록 하는 X를 구하는 게 나의 목표다.

 

2 곱하기 2 연립방정식도 짜증나는 일인데, 29 곱하기 29 연립방정식을 무슨 수로 '근사적으로' 해결하느냐? 계산 잘하는 인재는 현대 사회에 필요없다. 컴퓨터한테 시키면 될 일이다. 파이썬으로 이 엑셀파일을 불러와서 코드만 몇 줄 입력하면 컴퓨터가 알아서 다 해준다. 과연!? 두구두구두구... 연말 시상식 대상 발표보다 더 떨렸다.

 

파이썬의 numpy를 이용해 근사적 해를 구하게 하는 코드진행. 유사역행렬(pseudo-inverse)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안된다. SVD가 수렴(converge)하지 않는다는 말은, 컴퓨터가 오차를 작게 해보려고 이짓저짓을 시도할 때마다 결과가 일관되지 않아서 도저히 못 해먹겠다는 뜻이다. 즉, 내가 입력해준 엑셀 자료가 중구난방이라는 소리다. 어제 휴일 온종일 이 짓을 했는데 안된다고? 블로그에 짜잔 하고 써야하는데 안된다고?

 

그럼 어쩔 수 없지. 이 결과를 쓰는 수밖에. 좌절 후 1초 뒤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둘 중 하나다. 표본이 너무 인위적이어서(수많은 미러리스 제품들 중 다나와 인기순으로 30개만 골랐으니까) 방정식이 안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라면 내가 노가다를 수십 번 해야한다는 뜻이 된다. 그건 안된다. 못하겠다. 아니면, 카메라 제조사의 가격 매기기가 '스펙 가치의 합' 정도로 단순하지가 않거나 '지들 맘대로'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난 이 쪽이 좀 더 그럴 듯해보인다.

 

뭔가 뒷맛이 씁쓸하고 아쉽기는 하다. 어차피 가격이야 부르는 놈 마음이겠으나, 혹시나 성공했다면 앞으로 수많은 포스팅거리가 생겼을 텐데 하는 미련이 남는다. 연초부터 이렇게 또 헞싯거리를 시작하는가보다. 뭐 어때. 난 재밌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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