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필름사진 이야기

존포커스 이해하기(feat. 목측식 필름카메라 롤라이35)

나그네_즈브즈 2020. 12. 17. 12:17

롤라이35의 뷰파인더는 '구멍'이다. 이중합치식도 아니고 스플릿스크린도 아니고, 초점 맞추는 걸 도와주는 그 어떤 기능도 없는, 그냥 '구멍'이다. 피사체까지의 거리를 눈짐작으로 재서 렌즈 경통에 달린 포커스 링을 돌려야 한다. 눈으로 잰다고 해서 목측식이라고 부른다. 너무 저렴하거나 너무 크기가 작은 필름카메라에는 흔한 스펙(?)이다.

눈으로 어떻게 거리를 재? 짐작만으로 초점을 맞춘다고? 불가능하지 않다. 심지어 아주 쉽다. 친절하게도 렌즈에 그려진 존포커스 방식의 눈금 덕분이다. 존포커스가 뭐냐고? 따라와!

zone. 영역. 눈금으로 표현된 거리영역 안에만 들어오면. focus. 초점. 그 사이의 피사체들은 모두 초점이 맞게 된다. 결국 이 방식에서 말하는 포커스 존은 일본식 표현으로 치면 피사계 심도가 되는 셈이다.

햇빛이 쨍쨍한 맑은 날 야외에 롤라이35를 가지고 나갔다 치자. 셔속으로 필름감도의 역수를 맞춰뒀다면 조리개는 당연히 16이다. (아니, 아직도 써니16 규칙을 안읽었단 말이야?)


롤라이35s 렌즈에는 존포커스 눈금이 있다



롤라이35 렌즈 경통에 나타난 숫자들을 보자. 16이 두 개, 8도 두 개... 쌔하다. 이 숫자들은 왠지 내가 맞춰둔 조리개를 나타내는 것 같다. 이 부분은 움직이지 않고 고정돼 있으니 가만 냅두자. 그 앞쪽에 거리(0.9, 1, 1.2, 1.5, 2, 3, 6, 무한대)가 표시된 부분이 포커스링이다. 얘를 돌려서... 무한대 기호가 오른쪽 16에 오도록 하면 위 그림처럼 대략 2쩜 몇미터(왼쪽 숫자16이 가리키게 되는 거리)부터 별나라까지의 zone에 들어온 모든 피사체들은 focus가 맞게 찍힌다.


롤라이35s 렌즈에는 존포커스 눈금이 있다



피사체가 2m보다 가까이에 있다고? 그럼 다시. 포커스링을 살금살금 돌려서 왼쪽 숫자16이 1m에 오게 해보자. 그러면 자동으로 오른쪽 숫자16는 약 1.8m 거리를 가리키게 된다. 1m부터 1.8m 사이의 거리영역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초점을 정확히 맺게 된다. 이렇게 하지않고 오른쪽 16이 2m에 오도록 조절해도 물론 가능하다.

사용자가 노출이나 표현의도에 따라 선택한 조리개, 그리고 초점이 정확했으면 하는 피사체의 거리에 따라 얼마든지 응용은 가능하다.

날씨가 약간 흐려졌다고 상상해보자. 땅에 드리운 내 그림자를 봤더니 가장자리가 흐릿한 밝은 그림자가 됐다. 이러면 조리개는 11이지만, 나름 아웃포커싱을 좀 해보고 싶다면? 셔속을 한스탑 어둡게 해주고 조리개를 한스탑 밝게 해서 8에 두고 찍어도 문제없다.


롤라이35s 렌즈에는 존포커스 눈금이 있다
롤라이35s로 존포커스를 이용한 사진 예



약 5m 떨어진 미끄럼틀을 찍으면서, 앞쪽에 액자처럼 프레임에 들어오는 전경(피사체보다 가까이 놓인 경치)을 흐리게 나타내 보자. 3m보다 가까운 거리를 포커스 존에서 제외하면 된다. 미끄럼틀은 존에 들어오면서 기왕이면 나뭇잎들이 더 확실히 흐려지도록, 왼쪽 숫자8이 대략 4m까지 되도록 포커스링을 돌려줬다. 이 존을 벗어나 앞에 있는 것들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아웃포커스 될 것이다.

조리개가 8이라고 해도 가까운 물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 역시 가능하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조리개와 거리만 알면 그 피사체의 위치를 조리개가 형성하고 있는 존에 넣기만 하면 된다. 조리개를 4까지 열었다고? 똑같이 왼쪽 4에서 오른쪽 4까지의 영역에 원하는 피사체의 거리가 포함되도록 해주기만 하면 포커스는 맞는다.

가장 바깥쪽 눈금이 22, 바로 안쪽에 숫자로 16, 다시 눈금이 11을 나타내고, 숫자로 된 8, 그 안쪽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눈금 두 개는 각각 5.6과 4를 의미한다.


롤라이35의 존포커스 눈금. 조리개에 따라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다.



당연히, 아웃포커스가 잘되는 원리와 같다. 포커스 존은 피사계 심도와 같은 개념이다. 조리개가 열릴수록, 겨냥하는 거리가 가까울수록 좁아진다. 롤라이35에서 렌즈의 화각은 고정이니까 망원효과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거리감각이 아주 뛰어나지 않으면, 조리개를 최대 개방해서 생긴 얇은 존에 피사체를 넣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롤라이35의 렌즈는 최대개방 조리개가 2.8 또는 3.5에 그치고, 이마저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16으로 조여서 오른쪽을 무한대에 갖다놓고, 구도만 확인하며 찍는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롤라이35로 촬영한 사진들이나 20세기에 찍힌 거리사진은, 그래서 팬포커스로 된 것이 많다. 미러리스 af보다 빠르니까. 배경이 이야기를 돕게 하고 싶은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도 역시 그런 듯하다.

6m에 초점을 겨냥했다고 6m만큼 떨어진 것들만 초점이 맞지는 않다. 그보다 가깝거나 멀어도 초점이 나가지 않는다는 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존포커스만 이해하면 수동초점도, 목측식도 두렵지 않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