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필름사진 이야기

필름카메라 노출계 고장나도 사진 노출 맞추는 팁. 써니16 규칙(sunny 16 rule)을 아시나요?

나그네_즈브즈 2020. 11. 20. 12:00

필름카메라를 처음 만났을 때 기억이 납니다. 1968년에 발표되고 1970년대에 생산이 중단된 모델이었으니까, 제가 산 것도 아마 어마무시하게 낡은 녀석이었을 겁니다. 겉은 정말 깨끗하고 멀쩡했습니다. 작동은 작은 문제 두 가지를 안고 있었어요. 1/8초보다 느린 저속 구간에서 셔터속도가 마치 벌브처럼 작동하는 상태였습니다. 오일이 마르면 생기는 문제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느린 셔속으로는 찍을 일이 없어서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포스팅에 소개할 내용은 두 번째 문제점이었씁니다. 제 필름카메라에 장착된 고센 회사의 cds 반사식 노출계가 멈춰 있었습니다. 고장난 건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adorama에서 주문한 호환 배터리가 바다를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그걸 못 기다려서 저는 카메라에 첫 필름을 넣어버렸지요. 

 

자, 여기서부터가 문제입니다. 저는 노출계의 도움 없이 필름 사진을 찍어야 했습니다. 눈으로 뷰파인더를 보면 머리 속에서 측광이 이루어지는 '뇌출계'가 저한텐 없었지요. 아까운 필름이다보니 노출을 바꿔가며 여러 장을 찍을 수도 없고, 아무렇게나 대충 찍은 뒤에 보정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내용은, 노출계가 없어도 낮 시간 야외에서 좋은 노출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겁니다.

 

써니 16 법칙이라고 들어보셨을까요? 영어로는 sunny 16 rule 이라고 하더군요. 맑은 날 햇빛 아래에서 셔터속도를 감도의 역수에 맞추면 조리개는 16이면 된다는 내용입니다. 감도 200짜리 필름을 사용 중일 땐 셔터 속도를 1/200초 설정하고 조리개를 16으로 조이라는 뜻입니다. 정확히 1/200초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1/180초나 1/250초로 설정해도 됩니다.

 

환경에 따라 여러 변주가 있습니다. 똑같은 맑은 날이라고 해도, 모래사장이나 눈밭 위에서라면 조리개는 22가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구름이 끼거나 그늘에 들어가면 조리개를 열어주면 됩니다. 구름 낀 밝은 하늘 아래에서는 조리개 11, 먹구름이 드리운 날과 맑은 날 그늘 속에서는 5.6이 적당합니다. 이 정도로 어두운 환경은 맑은 날 피사체를 역광으로 찍는 상황에서도 비슷할 겁니다. 평범한 흐린 날에는 8이 적당하겠지요. 해질녘에는 4까지도 열려야 한다네요.

 

 

이 예시에서는 감도가 100입니다. 따라서 1/250초 f11은 1/125초 f16으로 읽어도 똑같습니다. 16이어야 써니16이니까요. 는 농담.

 

 

옛날에는 필름 종이곽 안쪽에 이 팁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하던데, 요즘 필름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구글에 찾아보면 권장하는 설정이 조금씩 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네거티브필름은 노출이 조금 맞지 않아도 관용도가 넓어서 한 스탑 정도는 현상할 때 커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권장하는 건, 여러 버젼이 있다면 조리개를 더 열고 찍으라고 조언하는 버전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요. ▲셔터스피드에서 약간의 밝기를 손해(카메라 여건 상, 1/100을 1/125로 찍을 수밖에 없음)보게 되고 ▲네거티브 필름의 경우 암부에서의 보정관용도가 나빠서 밝게 찍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국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취향의 영역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sunny 16에 따라 노출을 잡으려고 할 때, 날씨로 판단하기 어렵다면 그림자가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주 흐린 날이나 그늘 속에서는 그림자가 안보이(absent)지요. 평범한 흐린 날에도 거의 그렇습니다. 햇빛이 약하면 경계가 흐린 밝은 그림자, 강하면 날카로운 경계를 가진 어두운 그림자가 생깁니다.

 

 

음악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 중 최고는 단연 절대음감입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상대음감조차도 정확한 사람이 드물지요. 기타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6개의 줄을 튜닝할 때, 맨 첫 음인 낮은 미(E)를 피아노와 맞추면 나머지 스트링은 기타 목의 프렛을 짚어가며 상대적으로 맞출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음감이 비교적 정확하다면 말이죠. 

 

사진의 노출도 이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 바닥에서는 한 스탑 한 스탑이 아주 정확하게 두 배씩 차이나지요. 조리개와 셔터스피드를 조절하는 다이얼, 즉 기계가 하는 거니까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지만 기타의 첫 음인 낮은 미(E)처럼 최초의 기준은 있어야 합니다. sunny 16 rule이 모든 측광에 적용되는 만능열쇠가 되어주길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작은 팁이 기준이 되어준다면, 연습을 통해 경험의 지평을 넓혀가는 여정에 베이스캠프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흐린 어두운 날 팬포커싱을 하고 싶으면 조리개를 5.6에서 조인 만큼 셔터속도를 늦춰주어야 할 겁니다. 햇빛이 약한 날 초점이 맞는 거리 범위를 짧게 해서 배경과 전경을 흐리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조리개를 11에서 열어준 그만큼 셔터속도를 빠르게 가져가주면 됩니다. 또 이렇게 '뇌출계'를 조금씩 훈련 해두면, 언젠가는 밝은 실내 같은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도 어느 정도는 우리의 '상대음감'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창 밖을 보니 비가 갠 오늘은 구름이 낀 밝은 날 정도 되겠네요. 제 필름카메라에는 찍다 만 감도 200짜리 필름이 5컷 남아 있습니다. 셔터속도 1/250에 조리개 11이면 충분하겠죠? 풍경 찍을 땐 1/125초 f11, 정물 찍을 땐 1/500초 f5.6으로 해봐야겠습니다. 약간 밝게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저의 오늘 방구석 수다는 여기까지입니다. 자, 어서 카메라 들고 나가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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