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를 잘 쓰고 싶다면 많이 써보기만 해도 될지 모르지만, 글을 잘 쓰고 싶을 땐 써보는 연습만큼 읽는 연습도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나도 좋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많이 찍어보는 만큼 '보는 연습'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공허한 뻘글로 그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사진전시회와 사진집에 대해 검색을 많이 했고, 어렸을 때부터 용돈을 모으면 미술 전시회 보는 데에 다 쓰곤 했다는 지인에게 조언도 구했다.
사진전시회나 사진집은 '예술사진가'들의 치열한 무대다. 내가 취미삼아 기웃거리기엔 벽이 느껴진다. 몇몇 전시나 작품에 관한 해설을 읽어보면, 이건 '꿈보다 해몽'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수사로 가득해, 오히려 사진에 집중하기가 더 어려웠다. 이게 아닌가. 나 같은 예술알못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사진 읽기' 연습은 진정 불가능한 걸까. 구글링 키워드를 바꿨다. '초보 사진집 추천'
그렇게 알게 된 책이 '그날들'(윌리 로니스, 출판사 이봄)이다. 이 책을 소개하던 어떤 기사가 말하길, 보통은 취향이 제각각이라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눠보지 않고는 누구에게 사진집을 추천하기가 어렵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이거야"하고 추천해도 되는 사진집을 꼽으라면 "윌리로니스의 그날들"이라고 한다. 나는 그에 대해, 그의 사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다른 사진집과는 달리 사진 하나에 글 한 편이 실려있고, 복잡한 풍경을 깔끔히 정리하며, 명소와 모델 찾아 몰려다니는 생활사진가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책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두 번 정도 봤다. 여기에 실린 사진들을, 장르로서 한마디로 테두리 짓기는 어렵다. 거리사진도 아니고, 풍경사진도 아니고, 인물사진도 아니다. 그런데 거리사진도 맞고, 풍경사진이기도 하면서, 인물사진도 된다. 그러면서, 어딘지 모를 친근감이 진하게 느껴진다. 그야말로, '생활사진'들이다. 프랑스 사진작가인 윌리 로니스는 파리의 동네를 걷든지 유럽의 다른 곳으로 출장을 가든지에 상관없이, 언제나 사진기를 가지고 있었다. 대강 "카메라와 나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식의 표현이 몇 차례 읽혔다.
사진을 돕고 있는 그의 글은 항상, 책의 제목처럼, '그날은' 으로 시작한다. 그는 자기가 찍은 모든 사진을 기억하는 것 같다. 그 상황에 자신이 왜 있었는지, 날씨나 빛이나 분위기가 어땠는지, 어떤 감정이나 상상으로 그 장면을 바라봤는지, 심지어 이후에 그 사람이나 장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 해준다. 정말 친절하지만, 지나치지가 않다. 그의 글은, 사진만큼이나 간결하고 솔직하고 소박하다. 내가 즐겨 읽었던 「인연」(피천득)을 사진과 함께 읽는 느낌이었다. 처음 전시회나 사진집을 검색하며 느꼈던 예술 울렁증을 느껴볼 틈이 없었다. 그냥 끓여도 담백하고 시원한 '백합탕' 맛이 난달까.
내 부족한 독해력과 감성과 글재주로 이 책 소개를 망치는 게 두려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 사진집을 번역한 류재화님의 글을 조금만 인용해볼까 한다. 어디까지나 서평을 잘 못쓰는 나를 대신해 이 책을 더 잘 소개하려는 뜻에서다.
작고, 소담하고, 아무 멋도 부리지 않은 글. 윌리 로니스의 글은 사진만큼이나 담백하다. 정겹고 진실하다. 윌리 로니스를 잘 아는 친구들은 "이미지를 가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윌리 로니스"라고 말한다. 윌리 로니스는 또 말한다. "내 이미지들은 1차원적으로 읽힌다. 내 사진은 감정과 정동(情動, 초X파이 '정'의 움직임)의 사진이다. 허가를 받아 찍은 몇몇 사진을 제외하곤 내 사진은 거의 모두 아마추어가 찍은 것 같은 사진이다." '아마추어.' 그것은 2009년 향년 99세를 일기로 작고하기까지 평생을 프로 사진작가로 일했던 윌리 로니스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였다.
(중략)
대서특필될 만한 특종성 따윈 없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 아마추어가 찍었을 법한 아주 단순한 장면. 잘난 척하지 않는 착한 사진. 진심이 담긴 사진. 윌리 로니스의 사진이 주는 감동은 작지만 은근하게 퍼지는 햇살 같은 감동이다. ㄱ의 사진에 포착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여리고 소박하나 그 무엇에 진심을 다하며 집중한다.
사진과 글에 대한 감상과는 별개로 그를 닮은 기분좋은 내 특징 하나는, 아내를 정말 사랑하는 남자라는 거였다. 윌리 로니스의 아내는 네덜란드 태생의 화가였던 것 같은데, 알츠하이머로 남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진집에는 아내를 찍은 사진이 세 편 실려있다. 78세이던 해에 찍은, 세 번째로 실린 아내 사진에는 이런 글이 덧붙여졌다.
"나는 그 사진을 가을에 찍고 싶었다. 땅에 흩어진 낙엽들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내 사진이 훨씬 의미가 깊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임박한, 땅으로의 회귀. 나는 기다렸다. 그리고 내가 옳았다. 게다가 마리안은 3년을 더 살았다. 죽은 낙엽들 한가운데, 돌벤치 위에 앉아 있는 아주 작은 그녀를 본다. 이 사진은, 내게 몹시 소중하다. 더 이상은 말할 수가 없다. 마리안은 나뭇잎들의, 자연의 일부다. 풀 속의 작은 곤충처럼. 우리는 46년을 함께 살았다."
도서관 반납일이 다가와서 급하게 포스팅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러고보니, 그냥 이렇게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도 아쉽다. 보통 사진집은 비싸서, 내 책장으로 덜컥 가둬놓기가 쉽지 않은데. 뒤쪽 표지를 보니 이 책은 10,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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