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는 놀아도 괜찮다, 내 손에 있기만 해라

롤사모(Rollei 35S)야, 알쓰리(a7r3)야. 이렇게 편지로 마음을 전하기는 처음이네. 롤사모는 나랑 만난 게 어느새 1년이 다 되어간다, 그치? 알쓰리도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롤사모는 롤사모대로, 알쓰리도 또 나름 자기대로 매력을 지켜줘서 항상 고맙다. 너희가 들려주는 셔터소리를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희는 알까!

 

롤사모가 매물로 세상에 나왔던 지난 1월이 지금도 생생해. 그때 터질듯 내달리던 내 심장박동도. 알쓰리의 비싼 몸값을 내가 얼마나 선뜻 지불했는지도 너희는 알 거야! 심지어 렌즈를 데리러 성남에도 다녀왔었지! 생색 내는 거라고 오해하면 섭섭할 거야. 내가 요즘 너희들의 셔터를 눌러주지 못했는데, 다른 방식으로 해보는 내 애정표현이니까.

 

겨울이다. 한낮에도 해가 따갑지 않아서 사진 찍기 참 좋은 계절이야. 겨울에는, 겨울이라서 더 겨울스러운 그런 풍경들이 있지. 따끈한 호떡과 붕어빵은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고. 두꺼운 외투를 껴입은 사람들을 겨울 아니면 언제 찍을 수 있겠어? 앙상한 가지들 사이에 포근히 품긴 산사라든가, 새벽부터 내린 눈, 그 위에 뿌려진 하얀 연탄, 빗자루를 든 골목의 사람들도 이맘 때에만 찍을 수 있을 거야. 크,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그런데도 난 한참을 이렇게, 아무것도 찍지 않고 있다. 항상 그렇듯이, 이 썩을 놈의 직장이 훌륭한 핑곗거리지. 알쓰리가 전담해서 마크하는 우리 아내는 날씬하고 예쁜 모습으로만 찍히길 원하고, 롤사모를 통해서 바라보아도 세상은 내 눈에 좀처럼 사랑스러워 보이지가 않는걸. 아무런 이야기도 감정도 들리지 않는걸.

 

괜찮다, 너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집에 두 대나 있는 카메라가 나란히 놀고 있어도 걱정할 것 없다. 미안해 하지도 말아. 나도 너희를 미안해 하지 않는다. 너희를 버리지 않을 거야. 둘이서 사진을 찍는다면 분명 세상은 이전보다 아름다워질 테지만, 쉰다고 해서 누군가 피해를 입지는 않아. 다행이지, 내가 셔터를 눌러서 하루 먹고 살 돈을 버는 프로 사진가가 아니라는 점은. 사진은 내게 돈으로도 대신하지 못할 '기쁨'이니까 말이야. 돈 값을 해내는 게 아니다. 너희가 할 일은.

 

내 손에 있어주는 거야. 쉬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그것 뿐이다.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출근부터 퇴근까지는 롤삼오가 내 손목에 있고 집에 와서 잠들 때까지는 알쓰리가 어깨에 걸려 있으니,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진가이겠니.

 

영화 역린에서 정조를 암살하기로 한 날, 손에 칼을 묶으며 각오를 다지는 을수

 

내가 영화를 보며 구도와 표현을 공부하는 걸 너희도 알지. 역린이라는 작품에서 자객이 된 을수가 손에 칼을 묶는 장면을 기억할 거야. 할 수만 있다면 너희 둘도 내 손에 묶고 싶은 마음이야! 물론 사진에 내가 목숨을 걸지는 않더라도.

약속하자 우리. 이 투명한 스킨십을 오래오래 그만두지 않기로. 니가 다른 사람이 좋아지면, 내가 너 없는 게 익숙해지면, 그 때 헤어지면돼. 그런 노랫말처럼. 남들이 뭐라는 게 뭐가 중요하겠어. 서로가 없음 죽겠는데. 뭘 고민하겠어. 함께하는 지금을 그냥 즐기자. 매일, 처음 만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오, 미쳤어. 안돼안돼. 카메라한테 편지쓰면서 나도 모르게 또 진지터졌다. 수습이 안되네. 롤삼오. 알쓰리.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 해피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