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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렌즈 리뷰 - 소니 FE 24mm f1.4 GM (SEL24F14GM)

나그네_즈브즈 2020. 12. 5. 13:56

지금은 다 정리해버렸지만 미러리스 시절 사용했던 렌즈들,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을 남겨두고 싶어졌다. 그 때 참 변덕이 죽 끓듯 했고 내가 어떤 사진을 찍고싶은지 그런 것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렌즈들을 거쳤던 것 같다.

 

고려시대 청자를 만들어 조정으로 보내던 도공들은 애써 만든 도자기 대부분을 깨부쉈다고 한다. 그분들이 숱하게 깨먹은 고려청자 중에는 세상에 다시 없을 걸작들도 부지기수였다고. 누군가 물었다. 방금 그 청자는 후세에 다시 없을 빼어난 명작이 아니었느냐고. 도공은 대답한다. 임금이 이런 걸 보고나면, 그 다음 것들이 눈에 차겠느냐고. 적당히 잘 나온 것들만 올려 보내야 자기네 목숨이 붙어있을 것이라고.

 

여기, 소니의 실수라고 불리는 렌즈가 있다. 이 렌즈를 설계한 사람에게는 고려의 도공들이 지녔던 급나누기의 지혜가 없었다. 노빠꾸 장인정신 뿐이었나보다. 화질, 크기와 무게, 기능, 활용성, 가격 면에서 모두 사용자의 마음을 빼앗아버린 렌즈를 설계해버렸다.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폐기하지 않고, 세상에 내놓았다. 이제 다른 제조사는 물론이고, 소니 스스로도 렌즈를 내놓을 때마다 칼 끝에 서야 할 처지다. 이름하여 '이사금'이 겨누는 서릿발과도 같은 팀킬의 칼 끝 말이다.

 

이사금. 소니 FE 24mm f1.4 GM

 

 

 

소니의 실수. SEL24F14GM (이사금)

 

 

24mm인데 GM 등급이라서 통칭 이사+금 으로 불린다. 소개한 것처럼 끗판왕, 소니의 실수라고도 알려져 있다. GM 등급은 소니가 자체 제작하는 렌즈의 최상위 라인업이다. 칼자이스와 힘을 합쳐 만든 za 렌즈들이 어느새 2~3 순위로 밀려나고 있고, G 라인업이 2위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으며, 그 위에 G master를 뜻하는 GM이 있다. 예전 미놀타 렌즈의 기술력과 철학을 계승해 동그랗고 어여쁜 빛망울을 만드는 방향으로 최대한 기술력을 동원하는 게 특징이다. 

 

소니의 크롭 미러리스인 a6400을 가지고 있던 나는, 가지고 있던 렌즈를 모조리 팔아서 이사금을 영접하기에 이른다. 미국에 사는 절친이 결혼식 사진을 부탁했다. 결혼식 스냅은 36mm 화각으로 찍고, 망원이 필요한 상황은 '물러서기+크롭하기'로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였다. 비록 내 계획은 따라하지 말아야 할 바보짓이었지만, 이 렌즈를 선택한 것 하나만큼은 후회하지 않는다. 오늘은 그래서 이사금 렌즈를 추억에서 소환해보기로 했다.

 

1. 외관

예쁘다. 400g 넘는 무게라 a6400에 물리면 렌즈가 돋보이는데, 비슷한 초점거리와 조리개를 가진 다른 단렌즈와 비교하면 작고 가벼운 편이라고 한다. 크다는 건 순전히 필터구경에서 오는 느낌이지, 길이는 길지 않다. 후드를 체결해도 딱 알맞다. 만졌을 때 느껴지는 마감도 훌륭하다.

 

초점링도 부드럽다. 조리개링도 있다. 이 렌즈는 영상 촬영에도 무척 친화적인 외관을 가지고 있다. 조리개 링의 클릭감을 조절할 수 있는 스위치가 있어서 조리개를 활용해 노출을 바꾸더라도 소리가 녹음되지 않게 할 수 있다. 경통에 별도로 마련된 추가 커스텀버튼도 고마운 스펙이다. 초점고정 기능을 할당해서 전경 뒤로 움직이면서도 주 피사체에서 초점을 놓치지 않는 연출이 가능하다. AF모터로 DDSSM을 채용하고 있어 오디오에 모터소리가 잡히는 일도 없다.

 

2. 화질

선예도  ★☆ 조리개의 최대 개방이 1.4라고 해서 보통은 곧이 곧대로 1.4를 늘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최대 개방에서는 그만큼 심도가 얕아지고, 이 심도는 곡면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평면의 센서 구석구석에서 바삭거리는 선예도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것치고 이사금은 역시 훌륭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칭찬일 뿐이어서 일부러 별을 하나 깎았다. 오해는 하지 말자. 최대개방에서도 AF 측거점을 겨냥한 곳은 기가 막힌다. 그만큼 흐려짐과 선명함 각각을 탁월하게 표현해주는 렌즈다.

 

발색    이 렌즈에서 내가 가장 만족하는 부분이다. 무슨 외계인을 어떻게 잡아다가 고문을 했는지, X떡 같은 상황을 앞에 펼쳐놔도 컬러를 잘 잡는다. 

 

왜곡   ☆ 왜곡과 색수차를 얄짤없이 잡아내면서 덩치와 무게를 포기하는 게 제조사 시그마의 ART 라인업의 철학이다. 이사금은 다르다. 서두에 밝혔다시피, 얘는 큰 렌즈가 아니다. 굳이 '소니의 실수' 운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확연히 작은 크기와 가벼운 무게에도 불구하고 왜곡이 거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이 감히 완벽한 렌즈 앞에서 일부러 점수를 짜게짜게 주고 있다. 

 

색수차  ☆ 위와 같습니다. 괜히 하나 또 깎았다. 정신 똑바로 안차리면 렌즈를 결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에.

 

빛망울   최대개방에서 가장자리 빛망울은 조금 찌그러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보케충 넘어서 보케변태가 아니라면 응당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부분인 것 같다. 나의 경우는 크롭센서에 사용한 예라서, 이미지서클의 가장자리는 잘려나가고 중앙부~주변부 정도만을 담아낸 덕분인지 빛망울은 골고루 동그랗고 부드러웠다.

 

플레어  ☆ 플레어가 뭔가요. 이런 느낌. 소니의 렌즈코팅도 훌륭하다. 물론 극악한 상황이면 조금은 생긴다.

빛갈라짐 ☆ 16까지 완전히 조이면 봐줄 만하다. 역시 원형 조리개를 채택한 비용은 항상 여기서 청구된다.

 

3. 가격  ★ 160만원이던 출고가도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었다. 지금 중고가는 125만 원 정도. 물론 무지막지하게 비싼 건 맞다. 성능을 고려하면 다들 입을 모아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라고 칭찬한다.

 

4. AF 모터  소니의 자동초점 기술이 훌륭하다는 건 바디의 알고리즘이나 AF모듈의 성능만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다. 소니의 자사 렌즈들이 품고 나오는 AF모터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보통은 섬세하려면 빠르기가 어렵고, 빠릿하려면 정확하지 않기가 쉽다. 렌즈 속 유리알을 물리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AF모터도 그래서 SSM과 다른 뭐시기의 두 부류로 나뉘어 왔었는데, DDSSM이 그 분열의 역사를 지우고 다시 썼다. 요약. 조용하고 정확하고 빠름.

 

5. 최소 초점거리 ☆ 풀프레임에 물리면 상식적인 수준이다. 24mm 초점거리에 최단촬영거리 24cm인데, 나처럼 크롭센서에서 사용하면 최단촬영 거리는 그대로인데 1.5배 망원으로 바뀌니까 이 점에서는 언제나 약간의 이득을 본다. 

 

6. 범용성 ☆ 나는 35mm 화각의 범용성을 좋아한다. 풀프레임에 35mm 렌즈를 활용하는 것보다는 불리하다. 24mm 는 그래도 정통 광각단이라서, 굳이 끝끝내 비교하자면, 특유의 배럴 왜곡이 서운하긴 하다. 망원이 안된다고 깎은 것은 아니다. 광각 단렌즈 리뷰에서 그걸로 타박을 준다는 건 좀 앞뒤가 안맞으니까.

 

7. 샘플사진

부끄러운 시간. 다행스럽게도 그 친구의 결혼식 찍사노릇은 결국 취소됐기 때문에 사진이 별로 없다. 

 

 

 

 

 

 

8. 총평

이렇게나 골고루 좋은 별점을 준 렌즈리뷰, 내 기억으로는 없다. 그러나 생각보다 짧은 기간 사용하고 팔아버렸다. 선녀를 보내주는 나무꾼의 마음이었달까. 이렇게나 훌륭한 렌즈가 괜히 나 같은 주인을 만나서 그 반짝이는 능력을 다 펼치지도 못하는 게 미안했다. 렌즈는 죄가 하나도 없다. 내 똥손이 문제다. 그런 점에선, 떠나는 순간마저도 내 주제와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던 영물과도 같은 렌즈였다. 짜식. 좋은 주인 만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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