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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여행/현지인추천/스냅사진찍기좋은곳/노을이담담히스며드는예쁜동네/늦여름의장성동

나그네_즈브즈 2020. 12. 1. 20:48

어제 열한 번째 필름을 디지털 인화했다. 현상해놓고 묵혀뒀던 세 필름 중 마지막이다. 지난 9월 말~10월 초에 찍은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개인적인 것들을 빼더라도 그 중에서 늦여름의 장성동을 걸어다니며 찍은 사진들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계절로 보아도, 손목시계로 보아도, 여름해가 기울어가던 시간이었다.

 

 

 



예전 건너건너 아는 형 집에 갔을 때처럼, 두호동 노인복지회관에서 버스를 내려 건너편 길로 접어들었다. 장성동은 꽤 넓어서 접근하는 루트가 많은데, 특히 이 길을 좋아한다. 말은 이렇게 해도 동네 골목골목과 집집마다를 자세히 뜯어본 것은 이번에 사진을 찍으면서가 처음이었다.


 

 

 

 

이 쪽에서 보면 낡고 키 작은 아파트들이 커다란 새 아파트들을 등지고 다닥다닥 붙어 있다. 깡촌도 아니고 번화가도 아닌 특별한 동네다. 넘어가고 있어도 여전히 짱짱한 여름 해처럼, 골목의 표정은 나른함 속에서도 어딘지 모를 형형한 안광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주인이 비운 곁을 커다란 개가 지키고 있다. 무거운 쇠줄의 무게를 베고서였다. 찍던 당시에는 잠든 줄 알고 살금살금 다가갔는데, 눈을 뜨고 동네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스캔하면서야 알았다. 바보.

 

 

 



자그마한 아파트 단지들을 블럭으로 삼아, 골목들은 내게도 선택의 여지들을 허락한다. 햇빛도 그 중 어느 하나를 골라 넘어가고 있었다. 작은 공원이 있는 오르막길로 방향을 잡았다. 소녀들인 것만 같은 껍질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던 쪽이었다. 한 떼의 아주머니들이 벤치를 점거(?)하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헤어스타일도 의기투합하셨는지. 실루엣으로 처리될 것 같아 허락받지 않고 찍었다. 햇살 속으로 부서져 나가는 웃음소리를 끊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은 말을 걸어볼 용기가 없었다. 

 

 

 



이 동네의 메인 도로로 합류하는 작은 오르막길을 따라 걸었다. 길이 더해지는 끝자락에 문 닫은 포장마차가 보였다. 하필이면 정지 표지판 옆에 저렇게, 입을 앙 다문 채로 장사를 '정지'하고 있다니. 이 각도에서 햇살이 정말 아름다웠는데, 찍사의 실력이 모자란 탓인지 영혼이 없던 탓인지, 사진이 밋밋하게 나왔다.

 

 

 



큰 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곳에는 여느 주거지역처럼 길을 따라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내가 좋아하는「앵무새 죽이기」라든가 「원미동 사람들」같은 소설 속 배경일 것만 같다. 이곳은 항상 활기가 넘친다. 과일가게, 보세 옷가게, 부동산, 분식집, 은행, 슈퍼에서 일하는 이 곳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아는 것 같다. 꽃집도 물론 있다. 수수하게 예쁜, 그래서 남자친구 없는 젊은 여자가 주인일 것만 같은 그런 꽃집. 이지만 땅딸막한 아저씨가 이 가게의 사장님이다.

 

 

 



반대편으로 길을 건너면 아파트 단지가 많다. 담장 사이로 미끄럼틀이 역광을 받고 있었다. 아무도 없어서, 꼭 비밀의 공간을 엿보는 것만 같았다. 조리개를 더 열었다면 액자로 걸어 찍은 나뭇잎이 더 극적으로 흐려졌을 텐데, 미끄럼틀까지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더 정확히 맞힐 자신이 없어 적당히 조여서 찍었다. 기대를 많이 했어서 그만큼 아쉬움이 남은 사진. 그래도 내 호기심만큼은 사진에 드러난 것 같다.

 

 

 



이제 다시 길을 따라 내려왔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내리막길이라도 예쁘다, 분위기 있다, 하며 바라본 역사광 사진은 실제로도 그렇게 찍혀 주었다.


 

 



조금 더 내려가서는 오래된 빈 트럭이 보였다. 버려진 거라고 해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트럭이었다. 평소라면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있고, 차창 위로 나뭇잎이 어지럽게 비치고 있어서 신비로워 보였다. 운전석에 앉아서 졸고 있던 아저씨는 마법의 정글 같은 세계로 빨려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쪽 반대편 내리막에도 공원이 하나 있었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으러들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햇살이 그럴 듯하게 비추이는 방향을 찾아 빙글빙글 돌다보니 농구 골대 하나가 슬그머니 프레임에 들어온다. 새 그물이 달렸던 날에는 분명 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의 사랑을 받았을 텐데. 인생은, 과거를 핑계 삼아 이 외로움을 꾸역꾸역 씹어 삼키는 일인지도 모른다.

 

 

 

 

외로운 와중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에는 자주 가는 뒷고기 집에서 먹잔다. 뒷고기 좋지요. 달려올 아내를 기다리며, 먼저 도착한 식당 옆에서 두 장을 더 찍었다. 황금빛 노을이 스며든 골목. 이윽고 정면으로 마주 바라 본, 수동렌즈의 여섯 방향 빛갈라짐을 끝으로 해서.

 

 

 



사실 장성동 중에서도 이 쪽 블럭은,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맛집이 밀집(?)해 있다. 일본식 돈까스와 짬뽕, 만두를 잘하는 분식집, 뒷고기가 맛있는 식당을 드나드는 사이, 이 동네의 활기와 소박함에 흠뻑 반했다. 새 아파트, 중간 아파트, 낡은 아파트와 공원들이 있고, 요즘답지 않게 화가 나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 동네에서 느껴지는 세월은 찾는 이의 마음을 숭늉처럼 편안하게 해준다. 넘어가는 여름 해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다행이다, 오늘도 살아주어서. 그런 느낌이다. 코닥의 골드200 필름을 가져가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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