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카메라 메뉴에 들어가 보면 파일형식이라는 설정이 있습니다. 사진을 RAW파일로 저장한다거나 JPEG 형식으로 저장한다거나,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저장하도록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JPEG은 익숙한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현대 컴퓨터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이미지파일 형식입니다. RGB 컬러별로 8비트의 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스마트폰에서도 촬영할 수 있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RAW 형식은 낯설고 생소합니다. 이건 이미지 파일은 아닙니다.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렌즈가 담아낸 빛을 센서가 0과 1로 기록한 디지털 자료입니다. 구분해서 다시 강조하자면, RAW 형식은 센서의 (기억이 아니라) 기록입니다. 전혀 가공되지 않은 원본 그대로인데, 이것 그대로는 우리 눈에 전혀 사진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카메라 내부에서든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든, 별도의 변환 과정을 거쳐야 이미지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니터링은 임시적인 것이어서, 저장과 가시성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려면 결국엔 '이미지(가기성) + 파일(저장)'로 바꾸어 줘야 합니다.
RAW 파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재라는 개념은 생소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다면 필름 사진의 원본도 비슷하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사진을 다 찍은 뒤에 '원본'을 꺼내보면, 필름 위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반들반들하고 까만, 찍기 전 원래 상태 그대로입니다. 현상소에서 받은 필름에는 네거티브로 반전된 형체가 보인다구요? 그건 약품으로 화학처리를 하고 난 현상의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RAW 파일을 컴퓨터에서 보정해 JPEG 형태로 출력해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과정을 '디지털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인화의 개념과 뒤섞인 측면이 있지만요.
예전에는 사진 커뮤니티에 두 극단이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RAW 형식의 관용도를 이용해서 노을을 완전히 새빨갛게 물들이는가 하면, '보정한 이미지는 사진이 아니'라면서 JPEG 설정에서 독야청청하는 쪽도 있었다고 합니다. 파일 저장형식의 이 두 가지 옵션은 싸우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선택하라고 준 것입니다. 필요와 여건에 맞게 쓰면 그만입니다.
1. 원본의 의미?
보정한 이미지가 사진이 아니라는 건 정도와 취향의 상대성에서 기인한 주장이겠지요. 합성사진도 사진예술의 한 분야이기는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합성사진을 굳이 찍지는 않습니다. 예알못이라서요. 다만 보정은 합성과는 다릅니다. 평범했던 배경 하늘을 은하수 드리운 하늘로 바꿔넣는 게 합성입니다. 구름의 입체감이 조금 더 드러나도록 광도를 조금 낮추고 대비를 부분적으로 살짝 높여주는 게 보정입니다.
사진에 입문하시는 분들이 '어느 브랜드가 인물 색감이 예뻐요?' 라고 물어보면, 그 때부터 전쟁이 시작됩니다. 특정 브랜드가 예쁘게 만들어준다는 그 색감도, 결국엔 카메라가 내부적으로 프로세싱을 거쳐 뱉어내는 JPEG 파일의 특성이거든요. 사람이 하기 전에 사진기가 알아서 보정을 해준 결과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날로그 시절에는 보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 본인은 사진을 찍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필름도 종류별로 기본 색감이 다 다릅니다. 그걸 고르는 순간부터 원본이라는 개념은 의미를 오롯이 갖기 어렵습니다. 현상하는 온도와 시간에 따라 컨트라스트가 달라지고, 암실에서 인화를 하는 과정에서도 사진 일부를 조금 더 어둡게 또는 밝게 할 수 있는 스킬을 시전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진가가 의도를 강조하고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만의 시선과 느낌을 예술적이고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똑같은 라면으로도 끓이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르고, 악보는 하나지만 연주자에 따라 곡의 느낌이 변하듯이 말입니다.
이 분들에게 사진의 원본으로만 소비되어야 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답도 가관입니다. 사진은 그림과 달리 현실 그대로를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백 번 양보해서 보도사진으로 국한하더라도 타당하지가 않습니다. 사진 찍을 주제를 고른 순간부터, 찍을 시간과 장소, 사용할 렌즈, 셔터속도나 조리개를 선택하고, 앵글을 잡거나 셔터 누를 순간을 선택하는 그 때부터 사진은 현실 그대로일 수 없습니다. 3차원의 공간을 입맛대로 2차원의 사각형으로 자르고, 이 상대론적 우주의 시간 중 특정 1/125초만의 시간을 재단해놓고 현실이라니요. 웃을 일입니다.
영어로는 photograph(빛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뜻)인 사진은, '베낄 사'자에 '참 진'자를 씁니다. 사진이 '사진'이어야 한다는 믿음은, 진짜를 그대로 베꼈다는 이 낱말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그런 단어는 쓰지 않습니다. 중국어 사전에서 사진은 相片, 照片, 照相 로 나옵니다. 서로 상에 절반 반, 비칠 조에 절반 반, 혹은 절반 반을 떼고 서로 상과 비칠 조를 함께 사용한 단어입니다. 세계의 저편에, 이미지가 비친 절반의 다른 세상이 있다는 뜻으로 풀이하면 비약일까요? 원본은 허구입니다.
2. 합성 같은 보정
원분 순결주의자들의 보정 혐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잉태하게 한 어머니같은 존재가 있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사진을 거의 재창조의 수준으로 뜯어 고치는 '떡보정러', 그러니까 보정 혐오의 반대쪽 극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보정 프로그램을 처음 배우면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어두웠던 쉐도우가 살아나고, 컨트라스트나 채도가 마음대로 조절되는 신세계가 펼쳐집니다. 그걸 하다보면 사진이 어느 틈엔가 '그림'이 되어 있고는 합니다. 동물은 점진적인 변화에 자극을 얻지 못합니다. 베버의 법칙은, 자극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변화량이 기존의 자극에 비례한다고 주장합니다. 10kg 아령을 들고 있으면 그 위에 1g 껌딱지를 붙여도 더 무거워진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처럼요. 나의 보정으로 사진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가더라도 그닥 변한 게 없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입니다.
그러다보면 위의 사진과 같은 기형적 결과물이 튀어나오곤 합니다. (아내가 뒤에서 보고 '완전 그림이네' 하며 놀렸던 기억이 ㅠㅠ) 그런데 이렇게 자극적인 컬러로 도배를 해놓으면 SNS의 반응은 또 기가 막힙니다. 그러니 괜찮은 조언자가 없다면 브레이크를 모르는 떡보정러로 발전해 가기 쉽습니다. (적절한 보정이라는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한 가지 소소한 조언을 꺼내보자면, 저는 이제 '찍던 당시의 기억과 느낌'에 가까워지도록 보정합니다. 여기서 간을 맞추는 정도로만 저의 의도를 강조하는 식으로 작업합니다.) 리액션에 의해 그 정도가 교정되거나, 영원히 스스로 만족하며 혼자 즐거우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쪽 극단의 문제점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카메라가 프로세싱 해주는 색감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는 사진가도 있습니다. 저는 후지의 필름시뮬레이션이 돈 값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JPEG 저장을 맞춰두고 사용자가 카메라 내부에서 대비, 채도, 선명도를 미리 조절해서 찍는 경우도 있습니다. 촬영량이 많은 상업사진가들이 최적의 색감을 뽑으면서도 작업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렇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걸 다 무시하고, "보정 안하는 사람은 초보"라고 하는 떡보정러가 있는 게 문제입니다. 서로 싸우라고 만들어 준 설정과 소프트웨어가 아니라는데도 참.
3. 중용의 도리를 따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사진도 '해야 한다' 또는 '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쪽이든 단정짓는 순간 꼰대가 됩니다. 그런 소신은 자기 자신한테만 적용하면 됩니다. 본인한테는 당연해도, 다른 사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만 인정해도 여러 사람이 행복해집니다. 아웃포커싱? 하고 싶으면 하세요. 순광에서 찍는 사진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JPEG이 편하면 그렇게 쓰고, 자기만의 feel이 충만하면 보정하면 됩니다. 꼭 그래야만 하거나, 하면 안되는 건 없습니다.
이런 들 어떠하며 저런 들 어떠합니까. 수학이 아니잖아요. 물감이 빛이라는 것 뿐, 이 그림에도 정답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비추일지는 그 절반의 다른 세상, 즉 내 마음에 달린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오늘의 결론. 보정이 귀찮으면 JPEG, 카메라의 취향이 싫으면 RAW를 선택하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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