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에서 만든 당시 최신 미러리스 크롭바디 a6400을 가지고서도 나는 필름카메라를 샀다. 4K동영상, 사람과 동물의 눈을 찾고 실시간으로 피사체를 추적하는 자동초점, 매력적인 셔터음, 굉장한 연사능력, 준수한 DR, 각종 다이얼과 커스텀버튼의 편리함까지, 과분하다 싶을 정도의 전자기기를 가지고서도 말이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나를 필름카메라로 끌어들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은 그 썰을 풀어보도록 하자. 지금보니 유튜브 채널의 영향을 참 많이도 받았다.
1. 사진찍는 회계사 YK님
원래는 유명한 사진 블로거이신데, 나는 이 분을 유튜브로 먼저 알게 됐다. 사진에 대해 넓고 깊은 지식이 있으면서도 본인이 아는 것에 대해 신중하고, 다른 생각들을 존중할 줄 아는 분이라 내가 많이 믿고 따르게 됐다. 이 분이 사용하는 카메라는 소니의 플래그십 미러리스인 A9과 라이카 M10(모델명은 불확실하다) 정도였던 것 같다. 지구에서 가장 연사가 빠르고 자동초점을 귀신같이 잘 맞추는 카메라가 A9이라면, 이중합치식 수동초점만 지원하고 편의기능이라곤 개뿔도 없는 기천만 원짜리 라이카를 함께 운용하는 분이다.
2. 윤스타(YOONSTAR)
개그맨이었다가 제주도에서 사진 찍으며 피자/파스타를 팔고 있는 유튜버. 이 분의 방송을 당시에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a6400을 사용하면서 그 때 내가 느꼈던 걸 가장 잘 표현한 말을 최근에야 윤석주 님의 영상에서 찾았다. 카메라가 자동초점을 워낙 완벽하게 도와주다보니, 당시 난 그 감정을 '인간소외'라고 표현했었다. 카메라가 주연이고, 나는 그를 적절한 장소와 구도 앞에 옮겨다 주는 인력거꾼이나 머슴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종종 들었기 때문이다. 윤스타님은 소니 카메라의 그런 특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카레이서인데, 자율주행 차를 타고 트랙을 돌고 있는 느낌?"
3. 최마태의 POST IT
다른 재미난 컨텐츠도 많지만, 여러 카메라와 렌즈 리뷰도 상세히 다루는 채널이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망했다. 필름카메라 리뷰도 종종 올려주시는데, 그 중에 "작고 예쁜데 사진도 잘 나오는 카메라" 롤라이35 시리즈가 있었던 것이다. 따로 포스팅을 쓰고 싶을 만큼 내가 아끼는 카메라다. 그땐 정말 상사병이 났었다. 디자인이 일단 미쳤다. 완전 기계식 수동카메라라서 심지어 배터리가 없어도 사진은 찍을 수 있다. 초점도 거리를 눈대중으로 측정해 존 포커싱해야 하는 목측식이다. 레알 변태스러운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내 a6400이 사진찍는회계사님의 a9이라면, 기계식 완전수동 필름카메라는 그의 라이카에 해당하는 셈이었다. a9과 라이카는 비싸니까. 내가 그를 굳이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4. 필름카메라가 유행하는 이유 (내 생각)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게 감성으로 통한다. 그레인이 올라와도 갬성, 사진이 흔들려도 갬성, 초점이 안맞아도 갬성, 빛이 새어들어와도 갬성이라 부르면 용서가 된다.
B급 감성이랄까. 완벽한 화질과 완벽한 컬러. 디지털이 제공하는 그런 속에서 사용자만이 완벽하지 않다. 사진이 잘 안나오면 그건 오로지 내 손가락, 내 머리 탓이다. 그렇지만 필름사진에서는 낡은 카메라가 고장나서 망하고 찍다가 망하고 현상하다 망하고 인화하다 망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이 '괜찮아. 예뻐.'라고 해준다. 그런 부분에서 나는 위로를 얻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필름사진을 보며 특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 반대다. 서울대 진학반에 잘못 들어가 괜히 짐짝 취급받다가, 함께 도시락 까먹고 화장실 청소하는 보통의 친구들이 "짜샤, 그럴 수도 있지 뭐 ㅋㅋ 가자! 내가 매점 쏜다!!" 이러면서 노는 느낌이다. 숨통이 트인다.
필름카메라의 기계적 감성을 맛본 적 없는 20-30대 청년들에게는 이게 또 하나의 신세계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디지털로 게임하고 디지털로 관계를 맺고 공부도 디지털로 하던 세대이니까. 광학과 역학과 화학으로 응집된 이 아날로그 물체가 세상의 반대쪽 단면을 바라보게 해주는 바늘구멍, 어쩌면 하나의 탈출구이기도 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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