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사진철학 잡담

잡담_ 취미사진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지운 이유는?

나그네_즈브즈 2020. 11. 13. 11:18

저는 선생님한테서 사진기의 절반을 배웠습니다. DSLR을 팔고, 새 미러리스를 알아보려다가 유튜브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절반은 유튜브에서 배웠습니다. 유튜브에서는 그동안 몰랐던 사진기의 자세한 원리, 라이트룸을 다루는 방법, 여러 카메라와 렌즈의 리뷰들, 그밖에도 사진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배운 것은 실습도 했습니다. 찍어서 보정을 마친 사진은 일단 휴대폰에 옮겨 담습니다. 아내에게 자랑도 하고, 며칠 간은 뿌듯한 기분에 자꾸만 꺼내보게 됩니다. 당연히 인스타그램에도 올렸습니다. 팔로워가 시원하게 오르지는 않았어도, 꾸역꾸역 올린 사진이 200장 조금 못 미칠 정도는 됩니다. 

 

지난 1년 동안 3대의 카메라를 사서 그 중 2대를 팔고, 7개의 렌즈를 사고 팔았습니다. 290만 원어치를 사서 260만 원어치를 팔았습니다. 스트랩, 여분 배터리, 메모리카드, 필름 값은 뺀 금액입니다. 아내가 기겁을 합니다. 그런데도 얼마 전부터 또다시 새 카메라를 알아보고 장터링을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새 카메라를 고민하는 동안 꽤 우울했습니다. 이만큼 좋은 카메라를 가지고, 나만의 어떤, 예술작품 같은 걸 찍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찍고 싶기도 했고, 찍어야 한다 믿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95만 원에 첫 미러리스를 샀을 때도 그랬습니다. 겉으로는 취미인데 마음 속으로는 숙제였나 봅니다.

 

최근에 다시 그런 마음이 든 데에는, 내 사진에 발전이 없다고 느꼈던 것도 한 몫을 합니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사진이 거기서 거기입니다. 예쁜 모델, 예쁜 풍경, 예쁜 카페와 식당, 예쁜 소품이 만들어 주는 예쁜 사진들이 넘쳐 납니다. 더 많은 좋아요를 받고 싶어서 그런지 내 사진이 못나 보입니다. 인기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확실히 내 길을 뚜벅뚜벅 걷지 못하는 애매한 사진들 뿐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내 사진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더 좋은 새 카메라를 사는 거였습니다. 유튜브에 나오는 신제품 리뷰들을 구경하다 또 마음이 흔들렸고, 견고한 내 중심이 없다보니 사진에 새로운 도약과 성장을 불어넣을 방법이 겨우 그겁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지만, 저는 애꿎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앱을 삭제했습니다. 졸고 있는 주인을 술집으로 데려다 주자, 자율주행 말 대가리를 잘라버린 김유신 장군처럼요. 

 

1. 광고로부터 보호되기 위해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이 제게는 가장 주된 광고원입니다. 돌이켜보면 똑딱이를 사용하던 지난 반 년간, 광고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나의 세상에 카메라는 lx100 m2 한 대가 전부였습니다. 이제 다른 카메라, 다른 렌즈에서부터 눈과 귀를 막으려고 합니다. 건강한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자신이 안으로 성장하고 뿌리를 뻗어나갈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습니다. 

 

2. 안쪽으로 자라나고 싶어서

다른 사람의 취향과 만족에 내 사진을 끼워맞추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즐기고 나만의 방향으로 영글어 가고 싶습니다. 예술작품을 찍든 데이터 쓰레기를 만들든, 내 생각만 하려고 합니다. "나는 좋은 딸은 아니다. 좋은 친구, 훌륭한 학생은 더더욱 아니다"고 고백하는 임수민 작가는 스스로를 "나한테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춤 추러 오는 사람이 있든 말든, 나는 나만의 장단을 이제부터 치고 싶습니다.

 

3.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나는 이 순간의 결정을 잊고 싶지 않습니다. 이전의 내 모습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말고, 계속, 걸어 나아가고 싶습니다. 남들은 틈만 나면 켜는 앱이 내 전화기에는 없다는 사실을 이따금씩 들키는 것이 기분 좋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이 블로그도 그렇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관심에 목말라하지 않으려, 그저 한발한발 나만의 재미와 만족을 채우는 데에만 집중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매일 포스팅 하나 쓰는 시간이 소중합니다. 아무리 떠들어도 괜찮은 곳입니다. 투명한 발걸음들도 반갑고 물론 감사합니다. 이것조차도 나에겐 사진이 주는 즐거움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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