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사진철학 잡담

'민낯의 공간' 좋은 사진은 좋은 인생

나그네_즈브즈 2022. 12. 15. 14:44

사진.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말이다. 내 소개를 하게 될 때는 사진이 취미라고 슬그머니 고백하기도 한다. 사실은 이 블로그도 원래 사진에 대한 개인적인 수다 공간이었다.

그런데 사진이라는 이 주제에 프랙탈 같은 성격이 있다. 관점에 따라 위치에 따라 여건이라든가 경험이나 계획에 따라 느껴지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나눌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해 덤볐는데, 오히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더 많다.

사진 찍는 도구에 대해 방황이 길었었고,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아 사진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 느꼈다.

카메라나 렌즈야 늘 신제품이 나오지만, 광고로부터 떨여져 지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따금 다른 장비에 마음이 기웃거려질 때면 읽었던 글을 다시 읽기도 했다.

요즘도 리코의 GR3x를 눈여겨 본다. 여차하면 캐논 똑딱이와 필름카메라 세트까지 팔아버릴 기세다. 그러는 김에 나름 해를 넘기며 이제 겨우 실루엣을 만들기 시작한 ‘배운’ 사진 철학을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아버지는 평화주의자다. 어릴 때 우리 집 사람들은 싸우는 법이 거의 없었다. 어지간해서는 참고 살았다. 내 경우는 특별히 더 심했다.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외할머니가 키워주셨다. 남한테 폐를 끼치면 할머니가 비난받게 된다고 배웠다.

그래서 참고 살았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늘 전전긍긍했다. 예의 바르고, 얌전하고, 뭐든지 잘해야 했다. 내가 감정적으로 솔직해지거나 틈을 보일 때마다 우리 집은 어김없이 분란에 휩싸였다.

취직하고 결혼 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보수적이고 끈끈하게 연결된 직장과 지역정서 때문에라도 숨어 지내야 했다. 페르소나는 벗겨지지 않았다.

이러다 아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다. 아이 앞에서 아버지로서 연기해야 하는 인생은 또 얼마나 되려나. 팬 옵티콘의 무기수처럼, 시선의 감옥을 칭칭 두르고 영겁 같은 세월을 버티는 게 인생인 걸까.

 

사진에 정말 마음이 담길까?

사진.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말이다. 내 소개를 하게 될 때는 사진이 취미라고 슬그머니 고백하기도 한다. 사실은 이 블로그도 원래 사진에 대한 개인적인 수다 공간이었다. 그런데 사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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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찍힌다면 사진은 탈출구다. 말로 할 수 없는 내 마음이 그렇게라도 드러날 수 있다면. 장면을 바라보고, 구도와 노출을 정하고, 알맞은 장들을 추려내고, 의도했던 대비와 색감을 입히면서 다른 누구의 평가나 입방아를 잠시라도 잊을 수 있다면.

'잘 찍는 사진'에 또 끌려다니지 말자. 좋은 사진이라는 담론도 잊자. 내 자신이 즐겁고 행복한지에만 집중해야 한다. 사진을 찍을 때나 찍지 않을 때 내가 자주 펼쳐보는 메모의 첫 줄에 그렇게 적어놓았다.

예술병, 작가병은 쓰레기통에 쳐박아버리라는 조선희 교수님의 가르침은 그래서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됐다. 미디어에 나타난 그녀는 늘 “너 자신이 돼라, 따라하지 말고 멋대로 찍으라”고 나를 북돋운다. 멋대로 살아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용기는 생긴다.

 

사진으로부터의자유/육명심 - 사진철학, 사진책 서평

예술에 갇히지 마라. 사진은 사는 것 그 자체이다. 이미지로 된 언어다. 피사체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나의 마음을 찍는 것이다. 여과없이 드러내라. 숨지 말고 훔치지 말고, 정면 승부해라. 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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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 사진이 있다는 육명심 교수님의 메시지와 정말 닮았다. 숨 쉬듯이, 밥 먹고 똥 싸듯이 찍으라는 가르침과 같은 맥락이다. 숨기지 말 것. 훔치지 말 것. 체면차리지 말 것. 혹여나 어떻게 정의내리든 좋은 사진이 있으려면 먼저 좋은 인생이라야 할 것 같다.

사진에 문외한이라도 아내는 늘 말한다. 사진도 자기 만족이다. 맞다. 좋은 사진은, 그저 좋은 인생이다. 내가 살아본 적 없는 민낯의 공간이다. 나만 좋자는 게 아니라, 나부터 좋고 보자는 얘기다. 남한테도 좋으면 인정받을 테고 더 널리 꾸준히 칭찬 받을 수 있으면 밥줄도 되겠으나, 거기까지다. 남 보기 좋으려고 스트레스가 내 만족을 갉아먹게 둬선 안될 일이다. 그건 내 인생이 아니라 남들의 인생이다.

예전에는 보정이 끝난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좋아요' 눌러지는 속도와 개수에 집착했다. 광고가 싫어 앱을 지운 뒤로는 그러지 않았는데, 우연히 사울 레이터와 비비안 마이어에 대해 알게 됐다. 두 사람 모두 평생동안 자기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행복했을까. 그들의 사진도 (당시에는) 자기 만족이었나 보다. 살아온 궤적 때문인지, 그 평범한 진리를 난 참 어렵게도 배웠다.

마음이 기록된다. 자신에게 솔직해진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까 사진은 일기를 닮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 보여줄 일도 없고, 예술적으로 잘 쓸 필요는 더 없는. 좋은 사진. 좋은 일기. 좋은 인생. 그렇게 살자. 그렇게 찍자. 세상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옥죄지는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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