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사진철학 잡담

일상 여행객에게 사진의 의미는

나그네_즈브즈 2022. 12. 19. 14:18

올해 아내와 서울 여행을 두어 번 다녀왔다. 우리 부부는 뚜벅이라 차라리 도심으로 떠나는 여행이 편하다.

7월에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사진전도 보고 청와대 구경도 하는 게 주 목적이었고, 10월 말에는 서울 숲에 혹시 단풍이 물들었나 해서 가봤다. 단풍구경은 실패했지만, 망한 김에 성수동도 둘러보고 8-9년여 만에 명동에도 가보게 됐다.

나는 그립이 보강된 풀프레임 렌즈교환식 미러리스와 렌즈 두 개에다 삼각대까지 휴대했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줄였다고는 해도 두 사람 몫의 짐은 아내가 감당하고 있던 중이었다. 첫 일정으로 서울 숲을 돌자마자 우리는 지쳤다.

성수역을 찾아간 나는 유료 락커에 짐을 넣자는 제안을 도박처럼 내놨다. 돈이 드는 이 아이디어를 아내가 흔쾌히 수락했다는 점이 처음엔 마냥 놀랍고 신기했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했다.

딱 하나 남았던 빈 칸에 겨우 짐을 넣을 수 있었는데, 기적은 그 때부터 찾아왔다. 일단 몸이 가벼워진 이 시골 부부는 갑자기 신이 났다. 걸음에 활기가 돌았다. 게다가 거리는 낯설고 힙한 성수동. 나는 마음껏 셔터를 눌렀다.

프레임에 다른 사람이 걸려도 개의치 않았다. 인파가 북적인 밤의 명동에서도 거침 없었다. 관광지가 주는 낯설음 덕분에 여행객은 충분히 용감해졌다. ‘누가 뭐래도 지금을 기록하겠다, 어차피 난 머무르지도 않을 사람인걸!’ 돌이켜보면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2박3일을 서울에서 보내고, 포항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렸다. ?? 여긴 어디지? 집까지 걷는 내내 나는 아내에게 장난을 쳤다. 저기가 그 유명한 죽도시장인가요? 아, 이 길이 바로 그 중앙상가 실개천 거리? 우리 근데 숙소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 거예요?

이제 내겐 모든 날들이 여행 일정이다. 매일 다니는 익숙한 길도 관광지다. 우리 동네 어귀 슈퍼마켙의 노부부도 내게는 ‘현지인’이다. 지난 주에는 구경갔던 사무실에서, 제주도로 출장을 다녀오신 현지 팀장님 한 분이 귤을 나눠주셨다. 참 인심 좋은 곳이다. 감사한 마음에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 책상 위에 놓인 귤을 찍었다.

사진이 (이미지로 된) 언어라면, 난 유난히 말수가 적은 편이다. 그런데 여행지에서는 그나마 좀 수다가 자연스러워진다. 일상을 여행처럼 낯설게 바라보면서, 사진에 대한 심각함을 덜어낼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어떤 의미를 담을지, 어떻게 바라볼지, 그닥 신경쓰지 않는다. 비눗방울을 처음 경험하는 아이처럼, 그냥 반응한다. 사진을 찍으며 뺄셈하고 덜어내야 할 많은 것들 중 가장 중요한 마음이, 간결해졌다.

아내가 아닌 세계를 향해서도 여백이 깊어지고 감사가 늘었다. 길을 잃어도 계획이 틀어져도, 예전보다는 덜 좌절한다.

장마철을 제외하면 올해 1년 동안 가급적이면 사진기를 휴대하고 있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런다고 해서 사진을 더 많이 찍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새벽 월드컵 결승전이 승부차기까지 가는 탓에 출근 알람을 듣지 못해 지각을 했다. 급히 잡아 탄 택시에서부터 뭔가 허전했다.

카메라를 집에 두고 챙겨오지 않은 것이다. 사무실에서 사진 찍을 일도 없건마는 내 마음은 종일토록 불안하기까지 하다. 꼭 휴대폰 잃어버린 사람처럼. 여행지에서 사진기의 난 자리가 이렇게 크구나, 싶어 이 불안함이 괜히 반갑다.

요즘 리코의 GR3x가 눈에 아른거리는 이유다. 단순히 여러 사진 책에서 똑딱이 카메라의 휴대성을 예찬했기 때문도 있겠으나, 일상이 여행이라면 여행용 카메라가 늘 몸에 붙어있어야 하겠다는 필요가 생긴 탓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아내의 G1x mark III를 빌려 다녀야겠다. 나는 초점거리를 바꿀 선택지가 추가된 게 오히려 시간도 소요되고 불편한데, A7R3에 20mm f1.8 광각렌즈를 물려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APS-C로 크롭되는 super 35mm 기능을 이용하면 버튼 하나로 20mm와 30mm를 오갈 수 있으니까.

오늘 에세이의 요점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글을 마치자.

일상이 모두 여행이다. 마음 속의 복잡한 것들도 덜어내자. 삶의 여백과 감사가 늘어야 한다. 카메라를 잠시도 몸에서 떼어내지 않은 채, 마치 내일 떠날 사람처럼 그렇게, 아무도 보여주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다만 찍자.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 (Alfred D. Souz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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