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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여행/현지인추천/맛집/이탈리안레스토랑 그레이비_Gravy

나그네_즈브즈 2021. 7. 21. 14:15


주말에는 오래간만에 아내와 데이트를 다녀왔다. 사실은 점심 차리기 귀찮아서 외식을 하러 어딜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예전부터 한번쯤 가보고는 싶었지만 번번이 인연이 닿지 못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떠올랐다. 그레이비Gravy는 포항 환여동 길가에 존재감없이 숨어있는 곳인데, 이 식당 특유의 고급화 전략 탓에 재료가 소진되기 전에 입장이라도 하려면 반드시 점심시간에 골인해야만 한다.

전화를 걸었을 때만 해도 "오늘은 신기하게도 웨이팅이 없네요"라는 답을 들었는데, 택시를 타고 총알처럼 달려갔어도 '1시간 대기' 명령을 받았다. 식당 한켠에 대기고객들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던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뙤약볕을 그대로 얻어맞지는 않을 수 있었다.

며칠 전 구매한 카메라 렌즈와 액세서리들을 가져갔다. 사진도 찍고 메뉴도 미리 고민했더니, 생각보다는 금방 자리가 났다. 시원하게 트인 오픈형 주방에 바 형태의 자리가 메인이고, 별도의 테이블은 세 개정도밖에 없다. 홀 뒤켠에는 식자재를 두는 듯한 공간과 웨이팅석이 있어서, 나름의 고급화 전략(?)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놀라운 사실은, 예전엔 지금보다도 좌석이 더 적었다고 한다.

그레이비의 오픈 키친. 유럽에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 부부에게 차례가 허락됐을 때에는 무려 좌석 선택권도 함께 주어졌다. 우리는 바 쪽을 선택했다. 비교적 공간이 더 넓고, 뻥 뚫린 주방 사진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업원은 셋이 전부. 겉으로 봐서는 어머니 아버지와 아드님인 것 같았다. 서로 대화 없이 각자 할일에 묵묵히 집중하시는데, 신기하게도 동선도 겹치지 않고 쌓이는 업무도 없었다. 호흡이 잘 맞다는 뜻이다.

바 테이블에 앉아 이국적인 주방을 바라보자니 유럽에 여행을 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우리의 초상권을 고려해 셀카 사진은 올리지 않을 테지만, 분위기부터 맛집의 스멜이 흠뻑 느껴졌다.

주문을 하고 식전 빵이 나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우리는 통오징어먹물크림파스타와 쇠고기머쉬룸크림리조또를 확정하고, 논란의 라자냐를 추가하기로 했다. 둘이 와서 메인을 3개나 주문하려니 우리의 먹성을 들키는 것 같아 쑥쓰럽기도 했고, 무엇보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에 그레이비의 라자냐에 대해 후기를 소개한 그 어떤 데이터도 찾지 못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사람들도 아니고, 전인미답의 길을 가보기로 하고 특단을 내렸다. 우리가 주문을 마치자, 통오징어먹물크림파스타가 즉시 재료소진으로 문을 닫았다. 음하하하하하! 그레이비는 이렇듯 동작이 빠르지 않으면 도태되는 곳이다.

식전 빵(왼쪽 위) / 통오징어먹물크림파스타(오른쪽 위) / 쇠고기머쉬룸크림리조또(왼쪽 아래) / 라자냐(오른쪽 아래)


그레이비의 시그니쳐 메뉴는 통오징어먹물크림파스타라고 하던데, 국적불명의 퓨전요리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특색없는 요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오징어에 입혀진 고추장맛이 먹물소스의 담백함을 잡아먹었다. 파스타 위에 따로 매운 맛이 나는 소스가 소량 올려져 있었던 점은 훌륭했다. 직접 잘라서 먹는 통오징어 살결도 질기지 않고 부드러웠다.

쇠고기머쉬룸크림리조또는 탑픽이었다. 밥알이 적당히 익은 식감이나 부드러운 쇠고기와 크림 소스 자체로 흠 잡을 데가 없었다. 다른 메뉴들을 맛본 것은 아니지만, 그레이비에 간다면 라이스 메뉴는 꼭 이걸로 시도해보길 추천할 수 있다.

논란의 그... 라자냐는 훌륭했다. 스테이크도 아니건만 칼질하는 재미부터 훌륭했고, 치즈와 다진 돼지고기와 가지의 조합 모두 소스와 잘 어울렸다. 할 수만 있었다면 아내 몫을 빼앗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용은 아내가 결제했기 때문에 기억이 안난다. 메뉴판이라도 찍어둘 걸. 이렇게 먹고 5만 원 정도 냈던 걸로 안다. 밖에 나오니까 그레이비 특유의... 공포의... 재료소진 칠판이 떡 하니 세워져 있었다. 그레이비가 있는 환여동은 뷰와 인테리어가 아름다운 카페로 유명한 여남동을 품고 있는 곳이니까, 그레이비에서 식사를 했다면 그쪽으로 이어지는 코스도 괜찮다. 아내와 나처럼 배가 너무 부르다면 바닷가로 조금 걸어나가 바람을 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름 휴가철이다. 볼 것 없는 포항으로 향하는 불쌍한 피서객들도 많을 텐데, 바다같지도 않은 바다에 너무 실망했다면 영일대 해수욕장 북쪽에 위치한 '작은 이탈리아'를 맛보러 그레이비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외국 여행 갬성사진으로 마음도 힐링하고,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라자냐와 쇠고기머쉬룸크림리조또를 먹으며 살도 찌우고!

아 참, 근데 우리 다이어트 중이었는데...

포항에 숨어있는 '작은 이탈리아' Gravy (포항시 북구 삼호로 460) / 너무 늦으면 재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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