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투자전략

볼린저밴드는 무쓸모인가 - 등락률은 정규분포, 차트는 케바케

나그네_즈브즈 2021. 5. 4. 13:08

볼린저밴드라는 보조지표가 있다. 특정 시점으로부터 과거의 종가 자료를 가지고 통계적인 계산을 해주는 지표다. 해당 자료군의 평균으로부터 분포가 흩어진 정도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준다. 여기서 표준편차를 측정의 단위로 채택한다. 평균으로부터 표준편차의 k배만큼 떨어진 위쪽과 아래쪽의 값들을 연결해서, 두 개의 선으로 만들어지는 밴드를 보여주는 것이다. 보통은 기간을 20, k를 2로 설정하는 게 기본값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설정의 의미는, 최근 20개의 종가를 가지고 계산해서 평균으로부터 표준편차의 2배만큼 아래/위로 떨어진 가격을 표시하겠다는 뜻이다. 

 

왜 이런 계산을 하고 시각적 표시를 하는 걸까? 만약 캔들의 종가들이 정규분포를 이룰 것으로 기대한다고 가정해 보자. 정규분포를 이룬다는 얘기는, 자료들이 대부분 평균에 모여있고 아주 크거나 작은 값은 드물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과거에 그랬으니 앞으로 자료를 추가할 때에도 대략 이런 경향을 따를 것이라는 기대가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드물게 나타났던' 싼 가격에 주식을 매수한다면, 앞으로도 그보다 가격이 낮아질 확률이 대단히 낮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후에 주가가 이리저리 움직여서 '드물게 나타났던' 높은 가격 근처에 다다르면, 그보다 가격이 더 올라갈 가능성도 희박해질 것이기 때문에, 매도를 결정하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주가의 움직임이 언제나 정규분포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기존의 주가 분포에 데이터 하나를 추가할 때 이 '신입'이 착륙하게 될 영역은 분명히 현재 종가의 영향을 받는 것 같다. 결정된 종가 그 자체는 펀더멘털과 심리와 뉴스와 거시경제와 모멘텀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인 것이다. 주사위나 동전 던지기처럼 직전의 결과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형성되는 결과물이라고 볼 수 없다. 독립시행의 누적된 결과들이 정규분포를 이루기 때문에 종가들이 서로 '등락률'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종가가 그리는 곡선에 따라 높거나 낮은 가격은 희소할 수도 있고 흔하게 출현할 수도 있다. 오히려 경험적으로 보면, 이웃한 종가 사이의 비율을 나타내는 등락률이 정규분포를 따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상/하한가의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등락률은 대부분 0%에 근접한 값으로 등장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상/하한가와 비교될 정도로 극단적인 경우의 수는 여간해선 만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직전의 등락률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분포할 수 있다.

 

한국 주식시장에서의 멱함수 분포 (Power law distribution in Korean stock market)

최근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에 관한 책을 계속 읽고 있다. 지진, 산불, 전쟁의 규모, 새의 비행시간, 사람이 편지를 보내는 시간간격 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한 곳에 멱함수 법칙이 존재함

onewquant.github.io

이 포스팅에서 한국 주식시장의 등락률 분포를 정리해 주었다. 상승 등락률과 하락 등락률을 구분해 정리하면, 각각 멱함수 분포를 따르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실제 시장에서는 등락률이 상승/하락으로 구분해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 두 그래프를 붙여서 바라보면 가운데가 볼록하고 왼쪽/오른쪽 끝이 가늘어지는 좌우대칭 곡선이 될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어폐가 있을 걸 감안하고, 그냥 이걸 '정규분포' 정도로 퉁 치면 어떨까. 이어질 사고실험의 내용을 소개하는 대세에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

 

 

한국 주식시장의 등락률의 분포. 상승/하락 각각은 멱함수 분포라지만, 붙여놓고 한번에 보면 정규분포를 살짝 닮았다.

 

 

그래. 등락률이 정규분포를 따른다고? 여기까지는 어찌어찌 인정한다 치자. 최초의 가격에 등락률들이 덕지덕지 곱해지면서 만들어 낸 종가의 자료집은, 정규분포를 정말 따르지 않는 걸까? 그래야만 하는 개연성이, 혹은 그러지 않아야 하는 개연성이라도, 진정 없는 걸까? 볼린저밴드의 효용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해서, 이 생각이 줄기차게 나를 따라다녔다.

 

이 사태를 조금 단순화한 모델을 떠올려 보자. 1000원에서 시작한 가격이 10% 상승 두 차례, 10% 하락 한 차례로 이루어진 '등락률 분포'의 적용을 받는 상황이다. 시작하는 가격은 동일하고, 최종 가격 역시 곱해지는 등락률이 똑같기 때문에 1089원으로 모두 같다. 하지만 순서에 따라 경로(path)가 달라진다. 1100원이나 990원은 어느 순서로 조립해도 항상 경험할 수 있지만, 1210원이나 900원은 경로에 따라 전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곡선이 달라지면 분포도 달라진다. 노란색 실선 차트는 평균 근처에 자주 머무르는 분포를 나타낼 것이다. 반면 보라색 점선 차트나 빨간색 점선 차트는, +나 - 방향으로 치우친 분포를 나타낼 것으로 점쳐진다.

 

이 원시 모델을 1,000개의 등락률로 확장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엑셀을 이용해 정규분포를 따르는 1000개(정확히는 999개)의 등락률 집합을 만들어 냈다. 이 등락률 세트를 서로 다른 순서에 따라 최초 가격에 곱해주면, 완전히 움직임이 다른 가격 곡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사족이지만, 마지막 가격은 언제나 똑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곱셈은 순서에 상관없이 같은 결과를 도출하니까)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곡선이 달라지면 분포도 달라진다. 

 

동일한 등락률 분포를 가지고 만든 서로 다른 차트. 곱해지는 순서가 바뀌면 움직임도 달라진다.

 

 

이렇게 파생된 종가 자료를 파이썬으로 불러와서 히스토그램을 그리게 했다. 예상했던 대로 모두 서로 다른 분포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빨간색의 경로를 제외하면, 정규분포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찌그러져 있는 형태도 나타났다. 순서를 조합하는 너무나 많은 경우의 수들이 있기 때문에, 등락률의 곱에 의해 생성되는 종가의 분포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심지어 그것이 언제나 정규분포를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 욕심이라는 데에 이제는 수긍이 간다. 

 

그러면 볼린저밴드는 아무짝에도 무쓸모인가? 말 그대로 보조지표일 뿐이라 결정적 단서가 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용자의 의사결정을 보조하는 역할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평균과 표준편차가 정규분포에서만 계산되고 작동하는 통계인 것은 아니니까. 

 

구조적 성장주를 마크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주가의 분포는 '저렴한 영역'에 상당시간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게 장사의 정석이라지만, 이 경우에는 '싸게 사는' 결정이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진다. 괜히 어중간한 가격에 진입했다가는, 상당 기간 물려있게 될 가능성이 높은 덕분이다. 어떻게든 바닥 매수를 노려야 하는데, 볼린저밴드도 상황을 짐작하는 데에 얼마간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같은 등락률을 다른 순서로 곱해서 만든 종가의 자료 분포. 종가의 정규분포는 필수적인 귀결은 아닌 듯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