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작업노트

셀프주의 / 연말 사진 시상식 / 내가 뽑은 2020년 최고의 순간들 AWARDS

나그네_즈브즈 2020. 12. 30. 22:22

2020년이 만 하루 남았습니다. 평년처럼 다사다난했지만 유난히도 올해는 아마 '코로나19의 해'로 선명하게 기억될 것만 같습니다. 건강과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시간들이었습니다. 저로서는 감사하게도, 이 보잘 것없는 사진 글방을 시작하게 된 한해였기도 합니다. 혼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꿈만 같기도 합니다. 

 

연말이면 텔리비전에는 각종 시상식이 가득합니다. 보는 사람은 재미없어도 만드는 사람은 땔감으로 더없이 훌륭한 콘텐츠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많이 남긴 것은 없지만, 저도 그래서 올해 찍은 사진들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다름 아니라 제가 속해 있는 사진 동호회에서 '2020년 최고의 순간'이라는 주제로 역시 시상식 이벤트를 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출품은 하나만 했지만, 이 다락방은 제 공간이니까 아무렇게나 엮어서 올려 볼게요.

 

1. 보람차게 개고생한 순간

 

 

 

 

6월 21일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진 동호회 회장님과 단둘이서 달 뜨는 날을 피해서...... 은하수를 찍으러 갔습니다. 제가 면허 취득을 못하기 때문에 참 간절했는데, 죽기 전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카메라는 소니의 a6400 뿐이었고, 다행히 환산화각 24mm에 조리개가 밝은 시그마 C 16mm F1.4 렌즈를 이 때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녁 7시에 포항을 출발해 밤 10시쯤 충북 제천의 덕주산성에 도착했습니다. 포인트를 잘 몰라서, 미리 와서 찍고 계시던 분들의 앵글에서 등장했습니다. 욕부터 오지게 얻어먹고 시작해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24mm 화각으로도 뭔가 아쉬워서, 이 사진은 앵글을 중첩되게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스티칭 해서 만들었습니다. 라이트룸에서는 파노라마 병합이라는 기능으로 간단하게 지원됩니다. 별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저렇게 굵다랗게 보이는 이유는 초점이 정확히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타임랩스도 찍고 뻥튀기도 먹고, 새벽 4시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이 월요일이었는데, 얼른 보정하고 싶어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더군요. 유일하게 아내가 본인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인정해 준 사진이었습니다. 은하수 사진, 또 찍으러 가보고 싶네요. 그러려면 새 광각렌즈를 사야

 

2. 다시보니 더 갬성 터졌던 순간

 

 

 

 

'늦여름의 장성동' 포스팅에서 소개했던 사진이지요. 저희 동호회 연말시상 이벤트에 제가 출품한 사진이기도 합니다. 이벤트 출품 조건에 따라 '순간'이 들어가는 짧은 글을 함께 적어야 했거든요. 제가 이 사진에 붙인 제목은 '브로콜리 소녀들의'입니다. 아주머니들 수다 소리가 어찌나 맑고 유쾌했던지, 10대 소녀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제는 머리가 브로콜리처럼 빠글빠글해진, 한 때 소녀들의 잊지 못할 순간을 저는 이 풍경에서 읽게 됩니다. 

 

이 사진은 '되돌릴 수 없대도 괜찮다 / 교실과 운동장에 / 남겨두곤 했던 이야기보다 / 더 투명한 순간들이 / 언젠가 다시 빛날 테니까' 라는 글과 함께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내가 이 글은 무슨 뜻이냐고 묻더군요. 아주머니들도 예전에는 10대 소녀였겠지요.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벤치에서 끝도 없이 웃고 떠들던 순간들이 있었을 겁니다. 이제는 나이들고 지팡이까지 들어서 지나간 그 날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만은 아마 지금도 다르지 않아서, 이렇게 새로운 인연으로라도 만날 수만 있으면 그 투명한 기쁨들은 언제든 우리 곁에 있지 않겠냐는 게 제 생각입니다. 

 

1등하면 치킨 기프티콘이고 2등이면 커피 키프티콘인데. 기왕이면 1등이 좋겠지요?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하하하.

 

3. 사진가도 사람이라 행복했던 순간

 

 

 

 

사진은 삶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진이 사진이기 이전에 삶이듯, 사진가도 사진가이면서 그보다 먼저는 사람입니다. 취미사진가로서 행복했던 순간보다 사람으로 행복했던 순간이 더 생각나는 것은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 8월, 짧은 여름 휴가를 아내와 부산으로 다녀왔을 때의 사진입니다. 아내와 저의 '행복' one pick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이 사진이었지만, 너무 식상한 관광지 기념사진이라 출품은 안했습니다.

 

관광지 기념사진이면 어떻습니까. 저만 좋으면 됐지요. 사람으로 제일 행복했던 때는, 당연히 아내와 함께한 시간일 수밖에 없네요. 여보,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2020년은 어떤 순간으로 채워져 있나요? 다가오는 2021년에도 큰 욕심 부리지 않으면서 매일 소소하게 사진찍고 일상을 써내려가고, 그날그날의 굴곡에 촌부처럼 웃고 울며 그렇게 지내고 싶은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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