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사무실에서 잔업을 마친 뒤 집에 가는 길이었다. 절집처럼 조용한 주말 오후 거리의 낮잠을 누군가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회사 근처 공원이 소란스러웠다. 열 살을 갓 넘겼을까 싶은 여자아이 둘의 목소리였다. 학원가방을 메고, 과자 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푸드덕거리는 한 떼의 비둘기 속에서였다.
비둘기는 내게 있어선 중요한 소재다. 내가 인간에 대해 가지는 혐오가 그들에게서 어렴풋이 보인다. 게다가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평화의 새라서 그럼지 경계심이 적어, 대단한 망원렌즈가 아니고서도 찍을 수 있다.
다행히 내 어깨에는 카메라가 걸려있었다. 체면차리듯 눈치를 보는 표독스러운 눈, 반질반질한 대가리, 털이 돋아 닭발보다 300배 징그러운 발, 좀처럼 쓸 일 없어 보이는 날개. 영릭없는 비둘기들이었다. 우선은 역광 방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8-10마리쯤 돼 보였다.
둘기들이 놀랄까봐 무음촬영으로 했다. 조리개 4, 셔터 1/1000이었다. ISO는 노출보정으로 조절했다. 아이들이 던져주는 과자 때문에 텐션이 굉장히 높아져 있었다. 초점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반성하기로는, AF-C 모드에서 초점영역을 와이드나 존으로 할 걸 그랬다.
아이들이 "사진작가예요?" 하며 물어왔다. 아니. 내 취미를 소개하고 비둘기에 쫓겨 다니고 비둘기를 따라 다니면서,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아이들은 내 촬영을 도와주고 싶었는지 카메라 앞에 과자를 뿌려주고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30~40장 찍었던 것 같은데 초점 맞은 게 5장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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