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임인년 새해 복 많이 받으셔. 호랑이 띠인 나는 서른 일곱 되는 해에 기인~ 편지를 쓰고 있네.
호랑이 있잖아, 사자 말고 호랑이. 그 중에서도 시베리아 호랑이 말이야.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본 건데, 다 자란 시베리아 호랑이 한 마리는 수 백 제곱킬로미터나 되는 숲을 다스린대. 다스린다는 건 호랑이를 의인화한 표현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나 넓은, 자신만의 개인 전용 사냥터를 확보한다는 뜻으로 말이야. 그런데 내가 정말 놀랐던 건 그런 '능력'이 아니었어. 오히려 사냥을 열다섯 번 시도하면 겨우 두 번 정도꼴로 성공하는 '무능력'에 놀랐지.
호랑이한텐 미안. 무능력이라는 건 내 놀라움을 나타내려는 의도일 뿐이고, 그만큼 먹고 살기가 처절하다는 얘기를 엄마 앞에서 꺼내려는 거야. 그렇잖아. 세상에 어느 간댕이 부은 녀석이 호랑님 영역에서 사냥감을 도둑질하겠어? 호랑이 입장에서 자기 영역을 지키는 데 드는 품이라고는, 걸어다니며 오줌이나 누고 나무에 대고 손톱(아니, 앞발톱)이나 정리하는 수준이었을걸?
호랑이 정도 스펙이었다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게 엄살이라야 할 것 같았는데. 열다섯 번 시도해서 두 번 성공이라니 허탈하기도 하고.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잡는 데도 사력을 다하는 법"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겼나 싶어 괜히 짠하기도 하고.
그런 호랑이도 어릴 적에는 팔자 좋았겠지. 가만히 누워있거나 형제들이랑 뛰어놀다가 엄마가 물어다 주는 고기나 얻어먹으면서 말이야.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다행히 조금 자라난다면, 사냥 실습도 해볼 수 있었을 거야. 그러다가 독립하면 깨닫게 되지. 좋은 시절 다 갔구나, 하고.
엄마.
살아보니 그렇더라. 쉽지 않더라 먹고 산다는 거. 나도 그렇더라. 좋은 시절, 다, 지나갔더라. 엄마 아빠가 벌어다 주는 돈 쓰고, 해주는 밥 먹고, 사주는 옷 입을 때가 좋은 거였더라. 뭐하러 그렇게 기를 쓰고 독립하려고 아등바등 했는지 몰라. 그땐 그게 의젓하고 멋있는 건 줄로만 알았지. 어른들의 간섭이 아무리 싫었어도 한 삼십년 쯤 죽었다 생각하고 참으면서 가능한 만큼 얻어먹었어야 했었어. 엄만 섬뜩하지?
먹고 산다는 건 결국 호랑이에게도 우리에게도 다를 수 없는 문제잖아. 경제. 먹고사니즘의 유려한 동의어지. 짧았지만 나에게도 엄마의 '사냥 교육' 시절이 있었겠지? 마흔도 안된 내가 벌써 나이들었다기엔 너무 웃기지만, 독립을 하고 나만의 사냥이 시작되고 또 가장이 되니까... 옛날 생각을 자꾸 하게 되네. 엄마는 이런 날들을 다 지나왔던 거구나. 이렇게 해서 내 입에 밥을 떠 넣었던 거구나. 내 앞날도 염려해주며, 뭐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었겠구나.
근데 엄마. 이상해. 인생도 그렇고, 세상도 다 이상해.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다 잘될 거라고 했잖아. 열다섯 번쯤 애써도 성공하는 건 세 번도 안된다구. 난, 정말로 죽을 힘을 다했거든? 나이 서른 되도록 월급 봉투조차 받아본 적 없는 사람도 있는데, 스물도 먹기 전에 강남에 빌딩을 가진 애들도 있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토끼들이 이제 너무 빨라진 걸까. 다른 호랑이들이 너무 많아진 걸까. 숲 속의 법칙이 바뀐 게 아니라면, 배워온 것들 중에 뭐라도 내가 잊어버린 건 아닐까. 먹고 산다는 건, 도대체 뭐였을까?
하나도 모르겠어.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봐야지. 그런 궁리를 하던 끝에 신기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됐어. 엄마하고 내가, 아니 어쩌면 이 시대의 많은 부모들과 자녀들이, 마주 앉아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충분하게 대화해본 적이 없다는 거야. 우습지?
용돈기입장을 써보라던 숙제는 기억이 나. 놀부 이야기라든가 티브이 뉴스나 드라마 같은 모든 형태의 내러티브에서, 부자들이 항상 '나쁜 놈'으로만 그려지던 것도 기억나고. 그런데도 엄만 왜 내가 부자되길 바랐을까. 애들은 뭘 함부로 갖고 싶어서도, 돈을 벌어서도 안됐던 것 같아. 좋은 성적을 댓가로 선물이나 큰 용돈을 받는 건 괜찮았지. 부모님의 경제적 고민을 가족으로서 공유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던 게 당연한 거였을까. 대신 엄마와 아빠는, 나와 동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공부 잘해서 좋은 데 취직하고 높은 자리 올라가면 부자가 된다는 걸 믿게 해줬지.
그나마도 늘 우발적이었거나, 어른들의 단정적인 교훈에 침묵으로 답을 대신하거나, 조그만 의견차이에도 짜증과 비난으로 금새 달아나기 바빴던. 그 불편함을 비로소 다시 마주해보고 싶은 용기가 생겼나봐. 어쩐지, 거기에서부터 풀어보고 싶어졌어. '대화'를, 해보고 싶어젔어, 엄마 세월의 경제와, 내 앞날의 먹고사니즘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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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차 (계속 업데이트 예정) (0) | 2021.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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